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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고려건국, 천하통일의 시작 上편

by Kaiser0619 202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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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의 등장

 고려를 건국하는 태조(太祖) 왕건(王建) 877 3 14 송악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송악(松嶽) 호족인 세조(世祖) 용건(龍建)이며 어머니는 한씨부인이다. 왕건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용모도 훤칠하고 대장부다운 기상을 갖추고 있었었다. 

 고려를 창업한 왕건도 탄생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세조 용건과 위숙왕후(威肅王后) 한씨가 혼인을 다음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송악 남쪽 아래다. 어느날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도선대사(道詵大師) 이들 부부가 사는 앞을 지나가다 잠시 땀을 식히면서 쉬고 있던 도중 자신이 쉬고있는 집이 심상치 않아기장을 심어야 땅에다 어찌하여 삼을 심었을꼬?’라는 말을 꺼내었다. 말을 들은 세조는 도선대사를 쫓아간다. 도선대사는 세조와 함께 송악산으로 올라가 산세를 살피다가 잠시 무언가를 적고 봉투에다가 다음 세조에게 건냈다건넸다.

 

그대가 다음해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오. 그리고 이름을 왕건이라 지으시오.’

 

 과연 도선대사의 예언으로 위숙왕후는 임신하고 아들을 출산했다. 바로 왕건이다.

 세월이 흘러 왕건의 나이 17, 송악으로 돌아온 도선대사는 어린 왕건을 만나 군법과 지리, 천문과 산천과의 감흥 등의 이치를 전수해 주었다.

 

- 후고구려의 맹장이 되다.

 895 왕건의 나이가 19살이 되는 , 무렵 궁예(弓裔, 후고구려의 국왕) 강원도에서 한강일대까지 세력을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에 왕건이 살던 예성강 일대 호족들은 궁예의 세력에 겁을 집어먹어 귀부하기 시작한다. 그때 세조 용건도 다른 예성강 호족과 마찬가지로 궁예에게 귀부한다귀부 한다.

 용건이 귀부하자 궁예는 즉시 금성태수(金城太守) 삼고 맏아들 왕건에겐 송악성주(松嶽城主) 천거한다. 이때 당시의 왕건의 나이는 20살이다. 이때 이후로 왕건은 궁예의 신하로 들어가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왕건은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우기 시작한다. 광주(廣州, 경기도), 충주(忠州), 당성(唐城, 경기도 남양), 청주(淸州), 괴양(槐壤, 충청북도 괴산) 여러 고을들을 평정하여 궁예에게 바쳤다. 

 903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일대로 가서 서남해의 십여개 군현을 공략하여 점령하여 후삼국의 판도를 바꿔놓는다. 이때를 계기로 왕건은 나주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요충지로 부상한다. 

 3년후, 왕건은 정예군단을 이끌고 남진을 하여 견훤과 여러차례 전투를 치루며 백전백승을 거두었다. 왕건의 승리에 힘입어 궁예는 북쪽으로 대동강(大同江),  동남으로 낙동강(洛東江), 서남으로 나주를 거쳐 진도까지 최대의 영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궁예는 왕건에게 파진찬(波珍飡) 시중(侍中) 맡겨 정사를 돌보게 되는데, 왕건은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책을 폄으로서 신료들에게 공평무사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주위의 신임을 더욱 얻어 나간다. 

 

- 반정을 일으키자

 918 궁예의 폭정이 절정에 다다를때쯤 마군장군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은 폭군 궁예를 몰아내고 당시 백성들의 신임을 얻고있던 왕건을 추대하기로 뜻을 모으고 그날 왕건을 역성혁명(易姓革命) 도모하자고 하지만 신중한 성격의 왕건은 낯을 붉히며 정중히 거절한다.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임금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마음을 가지겠는가?”

 그리고 홍유가 이런말을 한다.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질투를 받는 법입니다.”

 그러나 왕건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러자 훗날 신혜왕후 유씨가 나타나서 왕건을 독려한다. 

“서방님 의병을 일으켜서 폭군을 바꾸는 것은 예전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수들이 의논을 들으니 저도 분발이 되는데 하물며 대장부이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신혜왕후는 서둘러 왕건에게 갑옷을 손수 입혀준다. 그리고 왕건은 만 명의 군사들과 함께 반정을 일으키는데 거기에 호응하는 백성들이 수두룩 하였다. 왕건은 궁예와 그의 일파들을 모조리 숙청한다. 그만큼 민심이 궁예에게 떠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918년 6월 15일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로 연호를 ‘천수(天授)’로 정한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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