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건국(高麗建國)
918년 6월 15일, 후고구려의 시중이던 왕건은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나라를 세운다. 국호는 ‘고려(高麗)’로 연호를 ‘천수(天授)’로 정한다. 고려의 시황(始皇), 즉 태조왕건(太祖王建)이 탄생한 것이다. 태조는 즉위하고 첫 조회에서 신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이전 황제는 우리나라 정세가 혼란할 때에 일어나서 도적들을 평정하고 점차 영토를 개척하였으나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매번 혹독한 폭력으로 하부 사람을 대하며
간사한 것을 높은 도덕으로 생각하고 위압과 모멸로써 요긴한 술책을 삼았었다.
부역이 번거롭고 과세가 과중하여 인구는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전은 굉장히 크게 지어 제도를 위반하고
이에 따르는 고역은 한이 없어서 드디어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형편에 함부로 연호를 만들고 왕으로 자칭하였으며 처자를 살육하는 등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지어 죽은 사람에게나 살아있는 사람에게나 다 원한을 맺었으며
결국은 정권을 전복당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바가 아니랴.
내가 여러 신하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모든 풍속을 변혁하고
다 함께 새롭게 나아가려 하노니 마땅히 새 규율을 세우고 이전 일을 심각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임금과 신하는 고기와 물처럼 서로 화합할 것이며 이 나라 강산들도 편안하고 밝아지는 경사를 맞이할 것이니
내외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마땅히 나의 뜻을 알지어다!
이 옥음(玉音, 임금의 말)은 고려사(高麗史) 제1권 태조 무인원년에 적힌 말이다. 태조 왕건은 즉위하자 백성들의 세율을 10분의 1로 고정을 시켜줬으며, 불필요한 노역에 대한 것도 모든 것을 해제시켰다. 이로서 태조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나 싶었는데... 쿠데타로 이루어진 건국의 대가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 건국의 대가
태조는 즉위한지 4일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최초의 사람은 바로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의 건국을 참여한 개국공신(開國功臣)이나 아내의 못된 꾀임에 넘어가 왕권을 노리고 반역을 도모한다. 하지만 반역은 마군장(馬軍將)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어 무마시킨다. 그 틈을 노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내전에 침입하여 왕건을 죽이려 하나 왕건은 태연한 태도로 전혀 겁을 안먹자 환선길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환선길의 난 完>
환선길의 난을 진압한 직후, 청주 출신들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소식이 왕건의 귀에 들어갔다. 청주 출신 순군 임춘길을 비롯하여 배총규, 경종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청주로 귀향해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으나, 모든 계획을 복지겸이 다 알아버렸다. 역모혐의가 탄로나자 이들은 배총규를 제외한 모든 혐의자들을 참살하는데 성공하였다. (임춘길의 난 完)
- 태조의 정치
태조 왕건은 즉위이후 여러 반란을 통해 호족(豪族)들을 무력으로 정벌하느냐 아니면 회유책을 써서 귀순하게 하느냐에 방법을 두고 여러가지의 고민을 하였다. 만약 무력으로 정벌한다면 이들은 견훤(甄萱, 후백제의 태조)에 빌붙어서 자신을 위협할지도 모르기에 단속이 필요하나, 만약 회유책을 써서 귀순한다면 훗날 또다른 후계에 대한 왕위계승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태조는 회유책이란 방법을 택했다. 태조의 성품은 무력과 권위를 믿고 함부로 덤비는 범장과는 그릇이 달랐고 힘보다는 믿음이 우선시되는 사람이었기에...
태조의 유화책으로 인해 골암성(鶻巖城, 현재 함경남도 안변)의 윤선을 필두로 후백제의 황제, 견훤의 아버지인 상주(尙州, 현재 경상북도 상주)의 아자개와 명주(溟州, 현재 강원도 강릉)의 김순식과 진보(眞寶, 현재 경상북도 청송)의 홍술까지 고려로 귀순한다.
그리고 925년 고을부(高鬱府, 현재 경상북도 영천)의 능문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고려로 귀부하려 하였으나 태조는 신라와의 관계로 인해 거절한다. 이 일로 인해 당시 고려와 신라(新羅) 사이의 관계는 매우 화목하였다. 그런데 이 관계를 매우 못 마땅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