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의 황산벌 전투
제2의황산벌대전(黃山伐大戰),바로 후삼국 최후의 대전인 일리천(一利川) 전투다. 이 일리천이라는 곳은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이라는 곳이다. 여기서 고려(高麗)의 태조(太祖) 왕건(王建)과 후백제(後百濟)의 신검(神劍)이 이곳에서 맞붙어서 최후의 승자를 가려낸 전투였다.
당시 왕건은 930년 고창(古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전투와 934년 운주(運州, 지금의 홍성) 전투를 계기로 후삼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가지게 되었고, 934년에는 멸망한 발해의 태자(太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의 유민(儒民)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했다. 그리고 후백제의 태조인 견훤(甄萱)과 신라의 마지막 국왕인 경순왕(敬順王, 신라 56대 국왕)도 고려에 귀순을하여 이제 전국시대의 마침표를 찍을때가 온 것이다.
936년 왕건은 전례없는 대군을 일으켜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후백제로 향한다. 그리고 견훤은 자신을 유폐하고 사랑하는 아들 금강(金剛)을 죽인 것, 그리고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멸망시키기 위해 태조에게 간곡히 요청하여 함께 출진한다.
양측은 이 일리천 일대에서 대 격전을 벌인다. 하지만 고려군 좌군에 옛 후백제의 건국군주이자 상부(尙父) 견훤이 적진의 장수로 서 있는 모습을 본 후백제의 군사들이 사기를 잃어 대부분의 장수들은 무릎을 꿇고 고려군에 투항했다. 이미 전투의 승패는 확정된 것이다.
결국 전투는 고려의 대승으로 끝나고 신검은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한다. 반란에 참여한 장수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신검과 양검 그리고 용검은 귀양을 갔다가 처형당한다. 그리고 견훤은 등창으로 인해 병사한다. 이로서 50년 동안이어진 후삼국시대는 끝나고 통일 왕조로서 고려의 역사가 시작된다.
* 고려 최고의 명장 유금필의 이야기
원래는 다음장으로가야 하지만이제부터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에서 크게 활약한 유금필의 일생에 대해 설명을 해주겠다. 그렇지만 저번에 말했던 고창전투에관한 건넘어갈 것이다.
- 호랑이의 탄생
유금필(庾黔弼)은 당대 최강의 무신(武臣)이며 평산유씨(平山庾氏)의 시조다.
처음 유금필이 보이는 것은 918년 개국(開國)이후 청주의 반란을 우려하여 홍유(洪儒)와 함께 군사 1500명을 주어 막게 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 권 92 열전제5 홍유 열전 및 견금 열전의 기록이다. 아마 이때 당시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은 2011명이라고 하는데 1등공신은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신숭겸(申崇謙), 홍유이며, 2등공신은 견권(堅權), 능식(能式), 권신(權愼), 염상(廉湘), 김낙(金樂), 연주(連珠), 마란(麻煖)이며, 3등공신은 2천명으로 정확한 명단은 알수 없으나... 유금필은 3등공신이라는 것이다.
- 북방의 패자
923년 유금필은 마군장군(馬軍將軍)이 되고 삼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골암성(鶻巖城, 현재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서 북방의 추장(酋長)인 300명을 소집하고 주연을베풀었다.이후, 모두 완전하게 취했을 때 틈타 위협하니 모든 추장들이 복종하였다.이후 1500명이 포로가 되었고 고려인 3천 명을 포로로 받았다. 이때 이후로 유금필은 북방의 군대를 이끌며 남진(南進)을 하게 된다.
- 청주전투
928년 본격적인 통일전쟁이 시작될 무렵 당시 유금필은 서부전선을 지키는 책임자였기에 견훤은 서부전선에도 공세를 취한다. 이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청주(淸州) 전투다. 당시 견훤은 김휜, 애식, 한장에게 3천명의 군사를 주어 청주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유금필의 반격으로 청주로 진군하는 후백제군을 완전히 쳐부수고 독기진(禿歧鎭)까지 추격해 삼백명의 군사를 도륙냈다. 당시 왕건은 충주에 주둔했고, 유금필이 충주로 가서 이 승리를 보고하자 상찬을 하였다.
“공산에서 신숭겸과 김락이라는 두 명장이 전사하였으므로 국가를 위해 근심을 하였다.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짐의 마음이 안심되었다.”
이 말을 했다는 것은 당시 유금필은 중앙군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3진에서 활동하고 전장에 파견되는 장수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