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워게임을 시작하자
고려(高麗) 초기에는 호족(豪族)들의 파워게임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속되었다. 이때 당시의 고려 조정은 왕식렴(王式廉)을 비롯한 개경의 북쪽세력과 왕규(王規)를 비롯한 왕무(王武) 지지세력과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세 번째 비(妃)인 신명순성황후(神明順成王后)를 비롯한 왕요(王堯)와 왕소(王昭)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때 여기서 치고 나가는 세력은 바로 왕규라는 재신(宰臣)이다.
왕규는 광주(廣州, 경기도)의 대호족으로 원래는 함규로 불렸으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태조에게 사성을 받아 왕규가 되었다. 왕규는 당시 왕무의 후견인으로 태조의 최측근이자 병부(兵部)의 실력자인 박술희(朴述熙)와 염상(廉湘)을 자기편으로 포섭하였으며, 당시 진천(鎭州)의 대호족인 임희(林曦)의 규수(閨秀)를 혼인으로 엮었다. 그리고 왕무가 고려의 황제(皇帝)로 즉위한 후, 본격적으로 왕식렴과 서경(西京, 평양)세력 그리고 왕요와 왕소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왕식렴은 당시 황실세력의 수장인 왕요와 왕소 그리고 충주(忠州)의 대호족인 유긍달(劉兢達)과 손을잡고 왕규의 전횡에 저항하였다. 왕식렴은 자신의 근거지인 서경을 통합하며 당시 개경(開京, 경기도 개성) 북쪽에 있는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와 평주 박씨(平州 朴氏) 등등대호족 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 왕무의 일생
왕무는 912년 전라도 나주(羅州) 흥룡동(興龍洞)에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의 맏아들로 태어난다. 왕건은 당시 왕의 이름을 무(武)라 정하였다. 그리고 당시 왕건과 장화왕후는 나주 완사천(浣紗泉) 연못에서 만났다고 전해졌으며, 왕무가 태어난 후, 그 마을은 후대에 가서 황제가 태어난 마을로 전한다는 홍룡동(興龍洞)이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후, 왕건은 당시 맏아들이자 당대 유력한 황자였던 무를 고려의 황태자의 명칭인 정윤(正尹)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당시 서남해안의 대호족인 나주의 오씨세력은 견훤의 나주침략으로 가문의 기반을 상당수가 손실을 입어 다른 대호족들에 비해 병력이 약해져 지위가 불안하였다. 그리고 외가의 가세가 약하여 권력 기반이 너무 약해진 무는 후에 왕좌의 게임, 왕위계승전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정윤으로 책봉된 왕무는 성년이 되자 당시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의 최대의 격전이었던 일리천(一利川, 경상북도 구미시) 대전(大戰)에 참전하여 선봉대(先鋒隊)를 이끌고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 왕무의 출생에 관하여... (19금 주의, 야사주의)
944년, 왕무는 고려의 2대 황제로 즉위를 하니 그가 바로 혜종(惠宗) 의공대왕(義恭大王)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부터 충주세력이 본격적으로 혜종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 “금상(今上)은 태조폐하께서 원하시는 아드님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일단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것부터 말하고 가겠다. 이 이야기는 고려사(高麗史)에 근거하며 이야기를 진행해나간다.
장화왕후 오씨, 이 사람은 나주 사람으로 할아버지는 부돈(富伅) 아버지는 다련군(多憐君)이다. 대대로 나주의 목포(木浦)에 살았다. 왕후가 일찍이 꿈을 꾸었다. 바로 나루터의 용이 뱃속으로 들어왔다.(이것은 태몽) 놀라 깨어서 부모에게 말하니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오래지 않아 태조가 수군대장군(水軍大將軍)으로 나주에 출진하여 목포에 주둔을 하였는데, 강가를 바라보니 오색구름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곳에 이르자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불러 사랑을 하였다.
그런데 왕후의 집안이 한미 하므로 임신을 안 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왕후가 노력을 하여 임신을 하였다. 이후, 태조의 적장자인 왕무가 태어났다. 그리고 혜종은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있었다. 그때부터 세상에서 ‘주름살 황제(襵主)라 불린 것이다.
이 때문에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황제의 위에 올랐음에도 왕무를 태자에 책봉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태자책봉에 주춤하여 망설여질 때, 군부의 실력자인 박술희에게 부탁을 한다. 박술희는 태조의 뜻을 알아채고 여론을 조성하여 921년 왕무를 태자에 책봉하게 된다. 허나 이 모든 것은 왕자의 난에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