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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숙청의 시대 1편

by Kaiser0619 202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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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위세력을 강화하라!!

  지공거(知貢擧) 쌍기(雙冀) 과거시험(科擧試驗) 시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왕소(王昭) 신임이 두터워져 더욱더 많은 중원(中原)인들을 귀하시켜서 고려(高麗)조정으로 끌어들인다. 애초에 쌍기도 귀화인이라 세력기반이 너무 약했고 신진관료들로 친위세력을 구성하는게 힘들어 더욱더 중원인들을 목숨걸고 영입을 한다. 중원도 당시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혼란스러운 난세라 제국의 관료, 학자들이 고려고 적극적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쌍씨집안을 중심으로 고려의 친위세력이 뭉치기 시작한다. 왕소는 쌍기의 아버지인 쌍철을 좌승(左丞)으로 임명해서 수많은 개혁작업에 동참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천거로 인해 친위세력을 완벽하게 구성하고 호족(豪族)들을 견제한다. 

 

 왕소가 당시 귀화인들을 친위세력으로 두려는데는 이유가 있었지...

 바로 그 전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공표하고 정책을 강행함으로써 호족들과 등을 돌린 상태다. 그런데 그때 당시 조정은 호족들에 장악된 상태여서 왕소는 그들을 견제하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였고, 왕소는 귀화인들로 자리를 매꿔 완벽하게 조정을 장악할 있다는 것이다.(물론 때문에 최승로가 광종을 몹시 싫어했다.)

 왕소는 당시 호족들의 집과 별장을 빼앗아 귀화한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귀화인들을 중용하여 내국(內國) 신하들의 저택을 빼앗아서 귀화인들에게 지급을 하였다. 허나 그들은 왕소의 파렴치한 정책에 반발하였는데 대표적인 신하가 바로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이런 왕소의 행동을 못마땅 여겼다. 그래서 서필은 왕소에게 가서 자신이 죽고 뒤에 자손들 대에서 집을 빼앗길 바에야 미리 집을 바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라고  대답한 다음 자신의 저택을 받치겠다고 했다. 광종은 서필의 발언에 분노를 하지만 나중에 생각을 해보니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닭고 다시는 그런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족들의 저택과 별장은 계속 빼앗지 

 

- 왕족을 숙청하라

 왕소는 황권강화에 걸림돌이 되거나 자신에게 도전하는 의심이 드는 인물에게는 자신의 낳은 아들까지 냉혹하게 대하였다. 그는 호족과 내국의 신하들 뿐만 아니라 골육과 황실에 대해서도 황권 강화에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히 숙청하였다. 그는 혜종의 아들인 흥화궁군(興化宮君) 경춘원군(慶春院君) 역모에 관련있다 하여 숙청하였고, 자신의 아들인 왕주(, 훗날의 고려 5 황제 경종(景宗)) 의심할 정도로 역모에는 민감했다. 그리고 태조(太祖)의 15황자인 효은태자 왕원(孝隱太子 王垣) 처형하였다.

 효은태자는 이름이 왕원으로 동양대군(東陽大君)이라 부른다. 태조의 후궁(後宮)이자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자 전국통일전쟁(全國統一戰爭)에 큰 공을 세운 충절공(忠節公) 유금필(庾黔弼)의 딸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유 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왕소는 왕원의 성격을 난폭하며 패서일대와 작당하여 반역을 꾸미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며, 호족들과 친하게 지내며 다른 뜻을 품었다는 이유로 숙청하였는데... 당시 최승로는 이러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경신년(庚申年, 광종 11년)에서 을해년(乙亥年, 광종 26년)까지의 16년간은 간악한 자들이 다투어 진출하여 참소가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몸둘 곳이 없고, 소인만이 제뜻대로 되었다.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종이 주인을 고소하기까지 하여 상하가 마음을 합치지 못하고 신하들과 이름난 장수들이 차례로 죽음을 당하고 골육과 인척도 모두 멸하였다. 하물며 혜종이 능히 형제를 보전한 일과 정종이 능히 나라와 가문을 보존한 일은 은혜와 의리를 논한다면 중하다고 이를 있는데, 모두 아들 하나만이 있었는데도 왕은 생명마저 보전치 못하게 하였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아들까지도 의심하고 꺼렸다. 그런 까닭에 경종은 태자로 있을 항상 불안에 떨다가 다행스럽게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 어찌 처음에는 잘하여 좋은 명예를 얻었는데 뒤에 잘하지 못하여 이지경에 이르렀는지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없는 일이다.

 

 958년 과거제도로 인재를 얻고, 독자적으로 육성한 친위대인 시위군(侍衛軍)을 통해 황궁을 장악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조정에서 권력기반을 완전히 닦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정치적 적대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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