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연의 고리
고려(高麗)와 거란(契丹)
이 두나라의 관계 역사는 되게 오래되었다. 첫 번째는 바로 고구려(高句麗) 시대다. 당시 고구려의 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시절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 이후, 발해(渤海)의 건국에 크게 관여하였고, 친선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당시 거란의 여러 유목민족 중 수장인 야율라보기(耶律阿保機)가 부족들을 통일하고 요(遼)나라를 건국하였다.
이 거란은 키탄(Khitan)이란 말로 많이 불린다. 아마 중국(中國)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의 후예라고 추정된다.
거란은 4세기 중엽부터 남만주(南滿洲)와 몽골(蒙古)의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 누런강) 유역에서 나타나던 유목민족이다. 이들의 생활방식은 농경과 목축을 하고 유목생활도 하였다. 이들의 언어와 문화는 오늘날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확실한 건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378년 거란은 고구려의 북쪽 번경을 침범하고 노략질을 하였다. 허나 고구려의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이 거란의 여덟 부락을 정복하였으며, 거의 거란족 대부분을 복속시킨다. 395년 광개토태왕은 소금을 얻기 위하여 염수(鹽水)인 시라무렌강을 정복하여 수많은 소, 말, 양 떼를 노획하고 수많은 고구려의 포로들을 되찾았다. 이후, 거란족은 오랜 세월 고구려에 동화되었으며, 돌궐(突厥)과 위구르에서도 활동하였다.
고려건국 당시, 거란족은 몽골과 만주지방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중 요나라의 태조(太祖)인 야율라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922년에는 야율라보기가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고구려의 후계제국인 발해를 멸망시키자 태조 왕건(王建)은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거란에 대해서는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 칭하고 적대적 태도를 보이면서 북진정책(北進政策)을 실행한다.
942년 요 태종(太宗)이 태조 왕건에게 낙타 50필을 보내자 왕건은 사신을 섬으로 유배를 보내며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여버린다. 훗날 이 사건을 만부교사건(萬夫橋事件)이라 불렀다.
만부교사건 이후로, 고려의 모든 국왕은 북진정책을 계승되어 고려의 정종(定宗) 시대에는 광군(光軍) 30만 대군을 양성하였고, 광종(光宗) 시대에는 청천강(淸川江) 유역과 개마고원(蓋馬高原) 일대에 군사시설을 갖추었으며, 광군을 광군사(光軍司)로 개편하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다. 그리고 고려는 송(宋)나라가 건국한 이후, 화친정책을 실시한다.
한편 975년에 통일을 이룩한 송나라는 985년에 고려 성종(成宗)에게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거란의 협공 제의하였다. 그리고 송나라는 압록강(鴨綠江) 중류에 있는 발해 유민의 독립국가 정안국(定安國)과 해상을 통해 내왕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에 거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 때문에 거란으로서는 고려의 움직임에 커다란 관심을 보았으며 훗날 이 모토가 제1차 여요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요 태종은 당시 오대(五代)의 첫번째 나라인 후량(後梁)과 후당(後唐)의 싸움에 끼어들어서 지금의 북경(北京) 일대인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얻는 등 성과를 올렸으나 끝내 장성(長城)을 넘어 남침을 하는데 실패하고 급사한 뒤, 보수당(保守黨)과 진보당(珍寶黨)의 대립과 정치싸움으로 대외국가와 겨룰 여유가 없었으나, 소태후(小太后)의 집권으로 정국이 안정된다.
그리고 요 성종(聖宗)은 발해의 후계제국인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으며 고려 침공을 착실히 준비한다.
이때 고려도 내부적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는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이루어진 호족(豪族)과 광종 이후 등장한 신진세력의 대립 그리고 고려의 문화를 수호하는 국풍당(國風黨)과 송나라의 문물을 받아드려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화풍당(華風黨)의 당파싸움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물론 이 이야기는 다음에 말할 것이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여요전쟁의 시리즈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바램이다. 이번에 KBS 고려거란전쟁이 방영되는데 꼭 잘 나와서 재밌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