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요전쟁(麗遼戰爭) 이제부터 난세가 시작되는 것이다.
요나라의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高麗)를 침공한다.
- 30년 난세의 서막
993년 5월과 8월 이때부터 경고의 시그널이 고려에 닿고 있었다.
고려의 번국(藩國)인 여진(女眞)으로부터 요나라가 고려의 영토를 침입할 것이라는 소식을 통보했다. 그때 이후로 10월에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당시 왕치(王治)의 고려 정부에서는 박양유(朴良柔)와 서희(徐熙)등을 서북면(西北面)으로 보내 요나라군을 막는 한편, 왕치가 직접 친정(親庭)을 하여 안북면(安北面)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한다. 허나 소손녕의 요나라 군대가 맹공을 하여 봉산군(蓬山郡, 현재 평안북도 선천군)을 빼앗기고 선봉장(先鋒將) 윤서안이 사로잡히자 왕치는 즉시 서경(西京)으로 환궁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이몽전(李蒙戩)을 청화사(請和使)로 하여 전쟁의 진의를 알아보게 하였으나, 소손녕의 요나라 군대는 항복만 요구할 뿐 명분이 전혀 없었다.
이때 이후로 고려 조정에는 두 파벌이 나누어진다.
“황제께서 장안(長安)의 대궐에 돌아가서 중신(重臣)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야 하옵니다.” (항복론자)
“항복은 불가하옵니다.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서 황주(黃州)부터 절령(岊嶺)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할지론자)
얼마나 한심한 자태인가
이 두 파벌이 대립한 다음, 할지론이 대세로 굳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 이 할지론의 논리를 박살 내려고 한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서희다.
이때 당시의 고려 조정에서 유일하게 서희만이 소손녕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한 서희와 이지백(李知白)이 항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할지론을 반대하여 이를 막았다. 그리고 이어진 안융진대전(安戎鎭大戰)에서 발해 황족의 후손인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와 전국시대(戰國時代) 최고의 영웅인 유금필의 손자 낭장(郎將) 유방(庾方)이 이끄는 고려군이 소손녕의 요나라 군대를 격퇴하자 고려조정은 화의론으로 돌아선다.
이때 소손녕이 다시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서희는 책임자로 요나라 군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이 회담의 시작은 의전분쟁(儀典紛爭)으로 시작한다.
의전이라는 것은 서양이든 동양이든 어디에서든 간에 존재하며, 의전의 차이로 인해 회담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다. 이 당시 의전분쟁의 논재는 누가 더 높은 지위인가에 대해서 의전분쟁을 벌인다.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다!! 그러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
- 요나라, 소손녕
“네 이놈!! 신하가 황제를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자만,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예법에 없는 이야기다!!”
- 고려, 서희
-> 이 말뜻은, 요나라 황제가 온다면 예법을 행하는 것이 정당하다. 허나 아직까지 너랑 외교관계를 맺지 못했으며 일국의 대신주제 너한테 절을 해야 한다는 것이냐?
이 과정을 두세 번을 반복해서 실랑이를 펼치나 서희는 대노를 하여 숙소로 철수하는 방식으로 응답한다. 이에 당황한 소손녕은 한발 물러서서 사람을 보내 사과한다는 말을 전해준 다음, 서로 맞절을 하고 동서로 향해 마주 앉았다고 한다.
- 서희라는 사람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
고려 제6대 황제인 성종(成宗)대 문신(文臣)이자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외교관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로 신라(新羅)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신라 제29대 국왕), 조선(朝鮮)의 이예(李藝)와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한국 외교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서희라는 사람은 외교관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하나 실제로는 재상(宰相)까지 지낼 정도로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전략가이자 원칙과 책임 의식을 지닌 정치인이다.
이 서희의 아버지는...
고려의 철혈 군주인 제4대 황제 광종(光宗) 앞에서 직언을 했던 강직한 재상 서필(徐弼)이다.
서희는 18세에 문과에 급재하여 여러 벼슬들을 전전하였고 982년 북송(北宋)으로 가서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 돌아왔다. 이때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 서희의 품격을 보고 감탄하여 ‘정3품 검교 병부상서(檢校 兵部尙書)’라는 벼슬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