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송(王誦)... 그는 경종(景宗) 왕주(王伷)의 아들이자 고려(高麗) 제7대 황제인 목종(穆宗)이다. 왕송은 어렸을 때 고려 제6대 황제인 성종(成宗) 왕치(王治)를 따라 황궁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나이 10살이 되던 해에 삼촌을 따라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 행차한다. 왕치는 서경의 정궁(正宮)인 장락궁(長樂宮)에 당도한 뒤 자신의 조카인 왕송에게 본인의 봉호였던 개령공(開寧公)을 물어줘 사실상 황태자(皇太子) 책봉을 하였다.
왕송은 17살에 성종을 뒤이어 고려의 황제로 올랐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주 비극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
- 허수아비
왕송은 즉위초반 제법 의욕적인 모습으로 정사를 돌보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의 천추태후(天秋太后)가 섭정(攝政)을 맡고 어머니의 정인인 동주(洞州)의 김치양(金致陽)이 실권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목종 집권기의 업적들은 모두 다 천추태후의 업적이라 볼 수가 있다는 것이오. 왕송은 허수아비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부터 적는 업적은 왕송의 업적이라고 말할 것이기는 한다.
일단 먼저 왕송은 왕의 모친인 헌애황후(獻哀皇后)를 황태후(皇太后)로 승격시키고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그는 황제의 생일을 장령절(長寧節)로 명명했고, 선황제와 선후(先后)들의 휘호를 덧붙였다. 그리고 과거법(科擧法)을 정비하여 광종시대(光宗時代)에 제정된 관제와 관복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한다.
왕송은 서경을 좋아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후계자라 공식화 한 자리가 바로 서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왕송은 고려의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서경을 호경(鎬京, 서주의 수도다.)으로 개칭하는 한편 서경의 관부도 낭관으로 환원시키고, 자주 행차하여 제사를 지냈다. 뿐만 아니라 호경에 대한 조세의 감면과 사면 조치도 여러 번 내렸으며 호경의 관리들과 군부의 인사들을 포상하며, 서경의 노인들과 과부들에게 물건이나 명예직을 내리는 등 후히 대접한다. 이로보면 고려의 수도인 개경(開京, 현재 경기도 개성) 보다 좋아하는 배도인 거 같다.